쓰기 수업과 피드백 : 교사와 학생의 성장 대화

2024. 5. 14. 15:44일상 수업 이야기

우당탕탕 우여곡절 쓰기 지도

2024년 1학기 쓰기 수행평가 : 고2 등급내는 과목에서 영어로 쓰기, 말하기를 가르친다는 것.

1. 내 수업이 한 주에 2차시. 중간고사 후 기말고사까지 12~14차시. 주제 잡고 개요쓰기, 초안 두시간, 피드백 받고 최종쓰기, 둔촌 세바시 영상 탑재까지 아무리 몰아쳐도 5시간은 필요. 지난 시간 결석했거나 딴짓하고 제대로 못/안한 놈들 다시 설명하고 보충지도 하다보면 어영부영 순식간에 한시간이 날아간다. 남은 시간에 적어도 교과서 한 단원은 나가야 출제거리가 있음. 미친듯 달려야.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기말 전에, 내가, 과연 끝낼 수 있을까..?

2. 가르치는 학생이 120명. 학습지에 쓰고 걷어서 피드백을 하려면 내가 읽고 돌려주기까지 너무 오래 걸린다. 구글문서로 초안을 작성하면 내가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줄 수 있고, 아이들이 각종 도구를 활용하기 용이하다. 번역기 없이는 한 단락도 못 쓸 아이들이 85%. 성인들이 실제 영어로 글을 작성할 때처럼 교실에서도 쓰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경우는 개요를 잡고 대충 내용을 구성한 후 번역기를 먼저 쓰고 번역 결과물을 수정한다. 그 후 지피티 돌려서 수정하고 싶은 부분 받아보고 다시 에디팅. 아이들도 이 과정으로 써보라 했다. 어법과 단어사용은 학생들 계정에 Language Tool 깔아주고 확인하게 했고. 최종은 초안없이 손으로 쓰기. 그래야 자기가 소화한만큼 쓸테니까.

3. 두시간 정도는 쓸 시간을 줘야하는데, 우리 학교는 노트북 사용이 가능한 교실이 단 한개. 내 파트너 강사님과 내가 겹치는 시간이 많아서 시간표 변경을 시도했으나 선택과목이 너무 많아서 불가능, 다른 수업 시간을 빌려보려 했으나 그것도 아귀가 맞지 않아서 실패. 결국 모든 반이 공평하게 한시간만 노트북 사용하고 한시간은 폰이나 종이를 사용하기로. 이 무슨 복장 터지는 일인지. 디지털 선도교육은 기기 있는 교실부터 제발. 하아.. 진짜 속상.

학생들 최종안을 읽으면서 중간고사 지필평가 점수와 비교해보니 지필 점수가 낮은데도 훌륭한 글을 쓴 학생들이 몇명씩 보여서 휘둥그레. 많이 대견하고 기특했다. 한편, 학생들에게 한시간만 더 주었어도 훨씬 더 글쓰기 능력이 향상되었을텐데, 서로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피드백을 해 주고, 평가요소를 꼼꼼하게 살펴볼 여유가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기말고사 준비 때문에 그럴 수가 없어서 정말 너무 아쉬웠다.

4. 생난리 부르스 속에 진행하고 있지만 우짜둔등 아이들이 쓴 글을 읽으니 학생들 하나 하나의 생각을 볼 수 있어서 좋다. 교실이데아에서 "에세이 한편으로 학생의 영어실력을 훨씬 더 잘 파악할 수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실력 뿐 아니라 한 아이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작업이 흐믓하다. 두달간 배운 내용을 종합해서 failure, diversity, competition & collaboration, core competency, growth 등등의 토픽을 골라 자기가 쓰고 싶은 내용을 질문으로 바꿔보고 글을 쓰고 있는데, 간질을 앓고 있는 학생이 자신이 겪은 일, 수모의 감정, 부모에 대한 원망 그리고 그걸 극복해내고 결국 지금은 자기의 병을 감추지 않게 된 과정을 적은 글을 읽고 눈물이 났다. 피드백 란에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 라고 적었다. 한글 번역만 읽었어도 풀 수 있는 문제, 빈칸에 전치사 묻는 문제, 틀린 어법 찾는 문제가 대부분인 중간고사 문항들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했는데, 글 읽고 피드백(이라기보다 아이랑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느낌) 주는 일이, 힘들지만 진짜 수업을 하는 것 같아서 좋다. 누가 복싱을 배웠는지, 어떤 병을 앓았는지, 어떤 어려운 시간을 보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누가 그림을 잘 그리고, 노래를 잘하는지, 운동을 잘 하다가 부상을 당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를 알게 되는건 참 보람있고 가치있다. 

5. 피드백은 brisk가 [glow, grow, wondering, next step]으로 잘 정리해 주어서 내가 느낀 점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주니 도움이 많이 된다. 또, 피드백을 할 때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피드백을 시작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주어야 이 글이 발전할지 너무 막막한 경우도 참 많은데, Brisk 가 이런 고민의 시간을 정말 많이 줄여주어서 너무 고맙다. 충분한 피드백을 주기 때문에 학생의 수준과 내 생각에 맞추어 취사선택하고 학생과 나의 대화로 수정 보완해서 쓸 수 있는데, 많은 데이터를 돌려보니 평가항목을 입력하고 받는 피드백이라 같은 내용의 피드백이 반복해서 나오는 경우도 많더라. 결국 교사만이 줄 수 있는 피드백은 따로 있다. AI가 아무리 잘 나가도 교사를 대체하는건 불가. 어쨌든 이렇게 개별 피드백을 주면 아이들이 정말 성장하겠다 싶었다. 학생들이 이런 피드백은 처음 받아봤다고 감동이라고 한다. 감동이어야지. 나도 정말 힘들었단다. 

 6. 영어시험 점수가 30점도 안되고 사정사정해도 단어시험을 안 보던 아이가 작문을 써서 제출했다. 아, 이 감동! 더구나 내용이 좋다! 물론 번역기를 써서 돌렸겠지만, 이렇게 번역기로 글을 작성해보고 연습해서 자기 손으로 다시 일부라도 이 글을 써서 낸다면 이게 진짜 쓰기 공부일듯. 온라인 도구가 없이 종이를 주었으면 이 친구는 단 한자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지난 중간고사에서 100점을 받은 우수생은 역경 극복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이 글을 읽으면 어떻게 역경을 극복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해놓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 티켓을 두고 와서 포기할까 하다가 다시 집까지 전력질주해서 가져와서 마침내 영화를 봤다는 글을 써서 나를 실망시켰다. 그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피드백을 적었다. 

🌱 Grow:
- 제목 'Against all odds'와 실제 내용 사이의 연관성을 좀 더 강화할 필요가 있겠네. 더 크고 중요한 장애를 극복한 이야기로 예를 들면 어떨까? 살면서 만나는 장애물 극복이 주제이고 이 글을 읽고나면 어떤 역경도 두렵지 않을거라고 해놓고 그 역경과 극복 내용이 너무 사소한 거 아니야?
-  'I was in danger of not being able to see the movie' 라는 표현이 많이 어색해. 영화를 못 보는게 위험에 빠지는건가?
-  '장애물'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상생활에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상황들을 의미하는 걸까? 
- 영화를 보기 위해 달려간 경험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더 큰 도전은 없었나?
- 글을 읽는 동안 신선하거나 새로운 정보, 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내용 등이 너무 없어서 실망..ㅜㅜ

초안 점수는 반영되지 않지만 학생들이 자신의 수준을 직관적으로 확인하도록 루브릭과 함께 채점을 해서 점수를 부여해 돌려주었더니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 이 친구가 달려와서 영화를 보기 위해 집까지 달려간 것이 자신이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우겼다. 그래서 'overcome'의 의미, 'obstacle'의 의미부터 다시 짚어서 설명해주었다. 최종안에서 내용을 싹 다시 갈아엎었더라.

7. 너무 너무 감동하고 이 어린 아이에게 배우게 된 글

 My topic is 'overcoming obstacles'. Everyone faces obstacles in life once in a while. There are two kinds of people who deal with obstacles, either overcome it or not. In this essay, I will introduce my story that I am overcoming obstacle.

My epilepsy happened in the 4th grade. I had fear of death when it took place first. Also, I am worried that I could not get along with my friend because of it. Especially, I felt anxious because it could occur again when I woke up in the middle of night, To cope with these problems, I made up my mind to do something. 

First of all, I manage my life to go to bed early. In other words, I am able to control my time and make the plan orderly. 
Furthermore, my mom has taken care of me well and told me encouraging words. Through this,  I have a broad perspective to understand myself and the world. I also have searched for medical knowledge about my illness and looked into the characteristics of epilepsy. 
As a result, I am able to confidently reveal my illness to my friends, although it is not easy.

Definitely, everyone has their own phobia and I still have that fear too, and yet I'm trying to overcome it. I want to help them. I am going to major in computer engineering and work IT field in future. Who knows I will invent something to help people like me.

이 학생의 지필고사 성적은 72점. 지난 중간고사가 난이도가 매우 낮았던 걸 생각하면 높은 점수가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생긴 뇌전증, 죽음에 대한 두려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될 걱정, 발작에 대한 불안...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나는 이런 대목이 뭉클했다. "어머니께서 저를 챙겨주시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어요. 이를 통해 저와 세상을 이해하는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습니다. " "또한 제 병에 대한 의학 지식을 찾아보고 뇌전증의 특징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친구들에게 제 병을 자신 있게 밝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물론 누구나 자신만의 공포증을 가지고 있고 저도 여전히 그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돕고 싶어요. " , "저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앞으로 IT 분야에서 일할 예정입니다. 저와 같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무언가를 발명하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

 

8. 그리고 몇 개 더 기록해 둘만한 글.

If you think your wall is too high to climb, build a ladder! 아주 훌륭한 표현!

 

이 글의 경우도 어떻게 피드백을 해야 좋을지 막막했는데, Brisk 가 주는 wondering 파트가 도움이 되었다.

 

이야기를 아주 생생하게 묘사를 잘 한 글의 예시

 

9. 안 좋은 글의 예시로 학생들에게 사전에 보여주면 좋을 글 - 자기 경험과 생각이 없이 남 얘기만 한 경우

Title: A life of failure

 My topic is failure.Everyone experiences failure in life. Someone loses a game, someone doesn't get into the college they want. So are we failures?I don't think so.Let's take a look at an example I've prepared. Here's a basketball player.This player missed more than 9000 shots in his career. He lost 300 games. On top of that, he missed 26 game-winning shots.He failed over and over again in his life.So did this athlete live a life of failure?Not at all.This player's name is Michael Jordan.Despite his many failures, no one would think of Jordan as a failure. What I'm saying is that we can expect to experience failure in our lives.But it doesn't mean a life of failure.I would say that life is not divided into successes and failures, but rather successes and processes (see Kang Ho-dong's quote). We will make tons of mistakes and experience failures in our lives.But if we don't hesitate and embrace it as part of the process of success, we will eventually get what we want.So let's all move forward!

[ 피드백] 

🌟 Glow: - OO아, 마이클 조던의 예를 들어 실패가 결코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설명했어. 강호동의 인용구를 사용하여 성공과 과정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 부분도 인상적이었고(이 말이 강호동만 한 말 같지는 않지만. ^^).

🌱 Grow: - 제목과 글이 어울리지 않는 듯. 실패의 삶이 제목인데 내용은 아닌걸?
-  '실패'라는 주제에 대한 너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사례가 전혀 없을까? 마이클 조던의 얘기만 하는건 인터넷 어디나 있는 이야기 같아서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마이클 조던의 이야기를 인용하더라도 그걸 너의 경험이나 네가 느낀 점으로 연결해야 너의 글이라고 생각되지 않을까?
-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극복하는지에 대한 너만의 생각이나 방법을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을까?
- 실패를 겪고 있는 친구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도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

10. 마지막으로, 읽고 나서 가슴이 먹먹해서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글. 

아이의 1차 초안. 그리고 나의 철없는 피드백.

 1차 초안은 구글 문서로 작성하면서 번역기와 사전, AI 뭐든 사용해서 글을 써보라고 했는데 정말 긴 글을 넘나 성의있게 썼길래 열심히, 잘하는 학생인줄 알았다. 아이들 하나 하나를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이 친구가 제출한 최종안.


초안을 보지 않고 최종안은 종이에 쓰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못한다고 안쓰고 있는 학생들이 있어서, 자기 이름 소개라도 하고, 한글로라도 쓰면서 아는 단어라도 영어로 최대한 써보라고 했다. 이 정도로 영어가 안되는 친구들은 정말 이름만 쓰고 아무 것도 안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자신이 점수를 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이렇게 한바닥 가득 한글로 쓰다니...

이 학생의 지난 중간고사 성적은 14.5점. 이 점수도 알고 푼 점수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교실에서는 눈에 잘 띄지않고 영어는 이미 포기한지 오래일 것 같은 이 친구 답지에 놀라서 이것 저것 모아놓은 자료를 뒤적여보니 기초학력 부진 지도 대상 학생이지만 내가 수업시간에 시킨 과업들은 꼬박 꼬박 빼놓지 않고 매번 열심히 했더라. 3월초 제출한 설문 응답을 열어봤더니 "English is ___________ because _____________", 를 채우라는 문항에 "영어는 애증인것같다. 이유는 사랑하고싶은데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데 귀에 잘 안들어와서 맨날 포기가 되기 때문이다." 라고 썼다. 이 아이 답지와 자료들을 보고나니 다음 진도가 안나간다. 이 아이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아이들이 제출한 글을 읽는건, 누가 어디가 아팠는지, 어릴 때 무슨 일을 겪었는지, 누가 미술을 잘하는지, 노래를 좋아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속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글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을 고르고 어법이 틀린 것을 찾는 문제를 풀어서 맞은 점수로 판단하는 것과 비할 수 없을만큼 거대하고 유의미한 일이다. 그런데 그만큼 또 어렵다. 나의 next step이 무엇이어야 할지, 이 아이의 next step이 무엇이어야 할지. 

아이를 불러서 말했다. 

"네 글을 읽고 두가지 면에서 놀랐어. 하나. 글을 참 흥미롭게 잘 썼더라. 샘 완전 재미있게 읽었어. 둘. 한글로만 쓰면 점수를 못 받을걸 알았을텐데 한 페이지 가득 끝까지 최선을 다해 썼더라. 보통은 점수를 못 받을걸 아니까 안쓰거든. "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아이가 말했다.

 "제 이야기를 샘이 읽으실거잖아요. 점수는 상관없어요."

우리는 오늘부터 1일. 시작해보자,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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